신풍 2020. 10. 9. 16:15

사마의

[ Sima Yi ,  ]

요약 중국 삼국시대 위() 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로, 서진(西) 건국의 기초를 세웠다.

출생-사망시호별칭국적활동분야

179 ~ 251
선제()
중달()
중국 삼국시대 위()
정치

자()는 중달()이며, 하내군() 온현() 효경리(, 지금의   ) 출신으로, 경조윤()을 지낸 사마방()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 나라의 조조(, 155~220, 로 추존), 조비(,  재위 220~226), 조예(,  재위 226~239), 조방(,  재위 239~254, 이라고도 함) 등 4대()를 보필하며 공을 세워 무양후()에 봉해졌다. 손자인 사마염(, 236~290)이 서진(西)을 세운 뒤에는 선제()로 추존()되었고, 묘호()를 고조()라 하였다.  

후한() 안제(, 재위 106~125) 때 정서장군(西)을 지낸 사마균()의 후손으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학()의 가르침을 늘 깊이 간직하고 따랐다()"고 전해진다. 형인 사마랑()을 포함해 가문의 8형제가 모두 총명해 이른바 '사마팔달()'이라고 불렸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마의()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조()가 이를 듣고 등용하려 했지만 병이 들었음을 내세워 거절했다. 하지만 208년( 13년) 승상()이 된 조조는 사마의를 압박해 문학연()으로 삼았고, 그 뒤 그는 황문시랑() 등의 벼슬을 지냈다. 조조가 위왕()으로 봉해진 뒤에는 태자중서자()가 되어 조비()를 보좌했다. 당시 사마의의 건의로 둔전제()가 실시되었는데, 이는 위()의 국방을 강화하고, 농업생산력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중용되었으며, 224년에는 상서()로 임명되었다. 226년 조비가 죽자, 조진()·진군()·조휴() 등과 함께 보정대신()으로 명제() 조예()를 보좌하였다. 231년 조진이 죽은 뒤에는 대장군()의 지위를 이어받아 제갈량(, 181~234)이 이끄는 촉군()의 공격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238년에는 요동()의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관구검(), 호준() 등과 함께 이를 정벌하여 요동() 지역을 위()에 병합하였다.

239년 명제()가 임종할 때 조진의 아들인 조상(,  ?~249)과 함께 애제() 조방()의 보좌를 부탁받았다.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로 전임시키며 군권()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그는 오()의 공격을 물리치며 기병() 중심의 군사력을 유지하였다. 그 뒤 병이 든 것처럼 꾸미며 은인자중()하였으나, 249년( 10년) 조상()이 애제()와 함께 고평릉()을 방문한 틈을 타서 정변()을 일으켜 조상()을 살해하고, 위()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 뒤 안평군공()에 봉해졌으나, 251년( 3년)에 병으로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의 [Sima Yi, 司馬懿]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