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유선 - 아버지 유비는 황제 재임 불과 3년 후 승하, 아들 유선은 무려 41년 간 황제 재임.
1. 총평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딱히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더라도 주변 환경에 의해 물들기 쉬운 인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정사 후주전(유선전)에서의 평에도 나오는 것으로, 현명한 재상이 있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으나 환관에게 물들어 우매한 군주가 되었다고 나온다. 제갈량, 장완, 동윤, 비의, 강유 등이 보필할 당시에는 촉한의 국정이 크게 문제 없이 잘 돌아갔으나, 비의가 죽고 그나마 재주 있던 진지가 죽으니 촉한이 제깍 막장 테크를 타는 것을 보면, 결국 1차적 책임은 환관 황호를 총애한 유선이 질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촉의 중앙집권화나 황제의 권위는 위, 오와 비교해 높은 수준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황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유선은 대사령을 남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또한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국가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다. 친동생인 유영이 황호를 비판하자, 유선은 유영을 멀리하였고 진지 이후 황호가 득세하여 세도를 떨치자 촉한 사람들은 다들 동윤을 그리워 했다.
유선의 치세는 41년에 이른다. 아버지 유비는 황제 지위에 불과 3년 밖에 재임하지 못했으나 유선은 매우 오래 집권 후
강유 등의 만류를 물리치고 위 장수 등애에게 항복하고 만다.
2. 위나라 장수 등애에게 항복 후 유선의 여생 - 위나라에 항복 후 위에서 안락공 벼슬을 받고 천수를 다 누렸다.
등애는 유선의 결박된 것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유선을 청하여 맞아들여 서로 만났다. 황제의 권한을 편의로 행사하여 유선을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수비군들은 모두 후주의 칙서를 받은 연후에 항복했다. 등애는 후주를 옛 궁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만났고, 물자는 엄정히 해두고 쓰지 않았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따르면 유선은 노새가 끄는 수레(騾車)를 타고 등애에게 나아가니 망국(亡國)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264년, 위군의 내분을 틈타 강유는 유선에게 촉한 재흥의 밀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강유의 반란은 실패하고 강유와 많은 신하들, 그리고 태자 유선을 잃었다. 유선은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하는 극정 등 몇몇에 불과하였다. 유선의 후궁 이소의가 자결했다.
이후 유주 안락현에서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서 말그대로 안락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서진에서 받은 시호는 사공(思公)이지만 기록에 따라서 혜공(惠公)으로 되어있다. 이후 전조의 유연에 의해 다시 효회황제의 시호를 받는다. 손호 등과 함께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