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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비판철학과 사회질서

신풍 2021. 3. 29. 07:49

(수필) 비판철학과 사회질서

/ 행정학박사, 시인 수필가, 문학평론가 인송 박정웅

 

요즘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언론계는 언론계대로 막말 파동이 만연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서도

남의 장점을 북돋아 주기보다는 그 약점을 후벼 파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책임질 수 없는 폭로와

괴담이 번지고 있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는 개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런 잘못된 사회 분위기는 먹고 사는데 너무 치우치다 보니

영혼을 정화시키는 철학적 사색에 너무 소홀하기 때문이라 여긴다.

철학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운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 철학적

사색이 혼란한 사회질서 안정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여겨서 이글을 쓴다.

 

필자가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교에 입학하여

교양과목에서 박종홍 박사의 철학 개론을 교재로

박종홍 박사의 직계 제자이신 철학교수의 강의를 수강한 바 있다.

맨 첫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철학은 뜬 구름 잡듯이 道通해 보고자 거창하고 고고한

정신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지식, 지혜를 찾고 활용하여

안정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러니 이 세상이 혼탁하다고 저 높은 산에 혼자 올라가서

도통할 목적으로 고립하여 사색만 한다고 절대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표를 얻으려고 인기영합위주로

문제를 풀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사회 안정을 위한 올바른 철학적 해결방안이란 이렇다.

자연과학의 보편적 진리를 얻는 과학철학 분야는

엄밀한 실험, 실습, 검증을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찾아내어

활용하고 사회에서 이를 토론하고 널리 담론으로 주장해야

사회가 좀 더 질서 있고 상식적,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칸트가 말하는 이른바 순수 이성의 그릇에 담긴 감성과 오성의

결합에 의해 지식, 지혜를 얻는 순수이성비판을 지칭한 것이다.

 

그 반면에 인간문제 해결을 다루는 정치 등 인문, 사회과학

철학 분야는 실험, 검증이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만을 고집할 수 없고

인간 심리의 복잡성, 가치관을 함께 고려하여

때로는 주관적인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것은 칸트가 말하는 이른바 도덕, 윤리, 법률의 보편적 지식을

얻는 실천이성비판과

眞善美聖의 보편적 지식을 얻는 판단력 비판 두 가지를

아울러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 심리와 가치관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속성을 가진 만큼

역사적,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많은 철학 사상이

시대마다 다르게 생겨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을 하는 궁국적인 목적과 가치는

사색을 통해서 우리 영혼이 더욱 맑아지고

사고의 지평을 넓히며

사회가 보다 평화로워지도록

건전한 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있다.

더 나아가 종교적 신념에까지도 다가 갈 수 있는

외공, 내공을 쌓는 데에 있다.

그 말씀에 공감하면서 그 후로 틈나는 대로

어려운 철학서적들을 혼자서 즐겨 탐독했다.

그리고 해설서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 결과 필자가 도달한 결론은

영국, 미국의 경험론과 유럽대륙의 합리론, 관념론을

통합시킨 칸트의 비판 철학이 대체로 철학의 핵심을 잘

종합하였다고 생각했다.

다수의 철학자들도 그래서  모든 철학사상은 칸트에게

모여 들어와 다시 칸트에게서 나갔다고 칭송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자연과학의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는 철학을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이라 명명했다.

영국, 미국의 경험론이 주장하는

모든 인식, 지식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 얻는다는

경험론의 일부 잘못을 지적하고

유럽대륙의 합리론, 관념론이 주장하는 오로지

선천적 소질 즉 순수이성을 통해서 만이 모든 인식,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일부 오류도 지적하면서

자연과학의 보편타당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지식의 생산을 빵 만들기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빵이 만들어 지려면 우선 빵틀이 있어야하고

각종재료와 섞는 비율, 열에너지가 필요하다.

여기서 빵틀에 해당하는 것이 칸트는

인간의 선천적인 소질 즉 순수 이성이라 보았고

빵을 만들 밀가루, , , 조미료 등 빵 재료는

인간의 많은 경험이 감각기관에서 느끼는 감성을 통해서 시행착오 끝에

각 재료의 필요성, 가치 등을 판단한 후에

서로 재료관계를 조정한 후 빵 재료를 결합시킨다고 보았다.

재료 상호간에 어떤 성분을 얼마 비율로 섞을 것인가와 어느

정도로 열을 가할 것인가를 조절하는 판단은

인간의 순수이성보다는 약간 수준이 낮으며 순수이성을 자극하여

감성을 순수 이성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힘이 되는

오성을 통해서 상호 연관적인 판단을 이끌어내 결국 빵이라는

지식을 만든다. 즉 순서대로 보면 경험에서 감성으로

다시 이 두 가지를 낮은 단계 순수 이성인 오성이 끌고 들어가서

순수이성 그릇에 감성과 오성이 담아지면 지식, 지혜가

탄생한다고 보는 것이 순수 이성 비판의 골자이다.

좀더 보충하면 오성에 의한 사물상호간의 연관적 판단에는

인간 마음 속에 12개 범위, 범주가 선천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타고난 우수소질인 순수이성이라도 이를 자극하고

개발하지 않으면 녹슬고 쓸모없게 된다.

그래서 순수 이성 개발에는 때로는 강한 강제적 주입식 교육이

필요할 때도 있고 이른 바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칭찬과 격려로

세로토닌, 엔돌핀, 다이돌핀이 나오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을 현대 조직관리론에선 x 이론과 y 이론이라 한다.

어느 이론이 더 우월할 수는 없고 대상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조직관리, 교육 방법이라 하겠으나 민주적인 성격이 가장 강한 것은

y 이론임은 분명하다.

요즘 교육철학에서도 지식, 지혜를 얻으려면

개인의 타고난 소질 즉 순수이성 개발과 후천적 경험, 환경을 모두

중시해야 할 이유를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어느 철학자보다

가장 명확하고 가장 조리 있게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 교육이 순수 이성 개발 즉 각자의 소질 개발에 너무 소홀하고

붕어빵 식으로 영국, 미국적인 경험, 감성 교육에만 치우친 점은

그래서 문제가 있다고 보며 경쟁력 있는 교육이 되려면

반드시 양자를 아우르는 교육철학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자기 뜻에 맞지 않다고 감정, 감성을 즉각 토해버림으로서

사회적 갈등, 분쟁이 극에 달하는 오늘의 사회적 분위기는

순수이성 비판 철학에서 보아도 크게 반성해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의 주장대로 감성은 순수 이성 그릇에

반드시 담겨 그 지배를 받아야 하기에 감성, 감정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 요인으로 일응 작용하되

궁극적으로는 늘 차가운 이성의

지배하에 두어져야 사회적으로 바른 지식, 지혜가 생산되고

인간관계와 사회에 안정된 질서와 평화가 온다.

국회에서 격렬한 토론은 하되 궁극적으로는 차가운 이성으로 돌아가

평회롭게 결론을 내야 토론 철학을 제대로 아는

멋진 선진국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

 

 

또한 칸트는 인간사회가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자유의지가 있는 바

이 자유의지는 개개인의 양심훈련교육, 예절훈련교육을 통해서

실천이성이라는 주관적인 도덕, 덕성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실천 이성비판이 순수 이성 비판보다 더 중요하고

차원이 더 높다고 말했다.

그래서 실천이성 즉 도덕이 명령하는 대로

주관적인 자유의지로 윤리, 예절을 잘 지킨 사람은

인간성이 좋고 도덕성이 뛰어나지만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행동을 잘못 결정하면 부도덕, 비도덕적인 인간이 된다.

유행된 말로 재승박덕이란 말도 바로 순수 이성 비판에

의한 지식 교육만 치중하고 실천이성비판에 의한 도덕, 덕성,

인간성교육이 크게 부족함을 한탄한 말이다.

그래서 각자 자유의지대로 도덕, 윤리가 잘 지켜지면

덕스런 인간이 많아져서 이 세상은 한 없이

평화롭고 질서가 잡혀 아름다운 사회가 된다고 보았다.

또한 실천이성의 핵심인 도덕, 덕성이 명령한 대로

행동을 실천하면 인간이 누구나 가장 귀한 존재임을

인정하게 된다고 칸트는 강조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헌법과 유엔의

인권선언은 칸트의 이 실천이성 비판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인권보장을 강조하고 있다.

칸트는 이런 내용을 단적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저 하늘에서 반짝이는 뭇별이며

다른 하나는 내 마음 속의 도덕이다.

이 지구가 무너져도 도덕은 지켜야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존엄과 가치를 가진 귀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누구도 인간의 인격을 이용물로 보는

수단가치로 대접해서는 안된다.

인간의 인격은 그 자체가 가장 존엄하고 귀하기에

누구나 존중받는 목적가치로 대접해야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 언론에서 서로 갈등. 막말하는

사태를 보면 순수 이성 비판 분야인 지식교육에만 편중되고

칸트가 그보다 더 중요시한 실천이성 비판 분야인

도덕, 양심, 덕성, 예절교육이 너무 소홀하여

이 사회가 아름답기는커녕 저급하고 추한

도덕적 작태를 보이거나 인격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이용물로 인신매매, 성추행, 상해, 살인을 하고

영혼을 팔아먹는 부정부패 등 악행을 서슴치 않는

경우도 많으니 한심스럽기만 하다.

우리 모두에게 도덕적 각성이 크게 요구되고 있다.

 

끝으로 진성미성을 판단하는 판단력 비판이다.

,,,을 다루는 문학, 예술분야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얻는 순수이성비판처럼

검증된 객관적 진리만을 추구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도덕처럼 자기의 자유의지대로

자기 양심에 따라 덕을 쌓는 주관적 진리만을 추구할 수도 없다.

또한 진성미성의 판단력 비판이 세 가지 비판 철학에서

칸트는 가장 차원이 높은 최고의 경지라 하였다.

오늘날 21세기에서 문화 소프트의 힘이 막강해져 가고

있는 추세를 칸트는 미리 예언했다고도 생각된다.

 

예컨대 아름다운 시 한편, 그림 한 장, 조각품 1개가

각각 있다고 하자.

이를 감상하는 사람마다 좋은 시다. 좋은 그림이다.

좋은 조각이라 느끼겠지만 그 좋게 느끼는 정도는 천태만상이다.

그래도 좋다고 느끼는 객관적 공통성, 공감대는 있다.

그 객관적 공감대와 어떤 개인만이 특별히 다르게 느끼는

순 주관적 느낌을 합하여 칸트는 間主觀的이라 부른다.

간주관적이란 한마디로 주관과 객관이 섞여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문학, 예술 작품 판단 같은 판단력 비판은

간주관적이기에 객관적인 정답은 없되 많은 전문가가 공통적으로

좋게 내리는 평가 결과를 일응 평가 기준으로 삼고

거기에 융통성 있는 해석과 멋과 맛을

살려내는 고도의 능력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 간주관적인 판단을 남용하여

실력 있는 숨은 작가와 좋은 작품이 사장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여 그 시정이 시급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문화. 예술계의 보이지 않는 학벌, 인맥, 정실인사, 감투가

검은 손으로 작용하여 끼리끼리 패거리로 보살펴주는

분위기가 팽배한 까닭이다.

각종 시상식에서도 심사위원의 부정부패가

물의를 빚은 것이 그 좋은 사례이다.

그리고 사회에 유익한 문화, 예술이 아니라

청소년과 일반 국민의식을 불건전하고

나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법으로 엄중히 다스려 사회의 독버섯을 도려내야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이상과 같은 좋은 비판 철학적 사유를

오늘의 혼란한 시대를 사는

한국의 지식인, 지성인이면 한번쯤 살펴서 좀 더 온유하고

겸손한 처세로 인간관계를 성찰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질서 있는 한국사회가 정착되리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