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 曹操 ]
요약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인으로 위(魏) 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조조
출생-사망자시호별칭국적활동분야출생지시대
155 ~ 220 |
맹덕(孟德) |
무황제(武皇帝) |
위무제(魏武帝) |
중국 삼국시대 위 |
군사, 정치 |
중국 안후이성 |
후한 |
자(字)는 맹덕(孟德), 아명(兒名)은 아만(阿瞞)·길리(吉利)이다. 패국(沛國) 초현(譙縣, 지금의 安徽省 亳州市) 사람으로 후한 헌제(獻帝, 재위 189~220) 때에 승상(丞相)을 지냈으며, 위왕(魏王)으로 봉해졌다. 아들인 조비(曹丕)가 위나라 황제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었다.
조조는 후한 환제(桓帝, 재위 146~168) 때인 155년(永壽 원년)에 태위(太尉)를 지낸 조숭(曹嵩)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숭은 4대의 황제를 섬겨 환제 때에 비정후(費亭侯)로 봉해진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였다. 배송지(裴松之)는 진수의 《삼국지》에 주석을 달며 양자가 되기 전 조숭의 본성은 ‘하후(夏侯)’였고, 따라서 조조와 하후돈(夏侯惇)이 종형제 관계라는 해석을 남기기도 했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었으며,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드러냈다. 고대 병법가의 저술을 연구하여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주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라는 저술을 남겼다. 그리고 시부(詩賦)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 두 아들인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함께 ‘삼조(三曹)’라 불리기도 한다. 조조는 20세 때인 174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관(郎官)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 돈구현령(頓丘縣令), 의랑(議郎) 등을 지냈다. 184년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되어 영천(潁川)에서 반란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제남(済南)의 동군태수(東郡太守)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89년 영제(靈帝)가 죽은 뒤,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세워 정권을 장악한 동탁(董卓)이 조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낙양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가 병사를 모았다. 그는 190년 원술, 손견 등과 연합하여 동탁 토벌을 주창하며 거병했으며, 발해태수(勃海太守) 원소(袁紹)가 맹주가 된 반동탁 연합군에서 분무장군(奮武將軍)의 직위를 맡았다.
192년 동탁이 살해된 뒤 조조는 연주(兗州)를 평정하여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5년 헌제가 장안(長安)을 탈출하였을 때, 순욱(荀彧)의 건의에 따라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 일로 조조는 건덕장군(建德將軍), 진동장군(鎭東將軍) 등에 임명되었고, 양조부인 조등과 마찬가지로 비정후로 봉해졌다. 196년에는 자신의 근거지인 허현(許縣, 지금의 河南省 許昌)에 궁을 지어 헌제를 그곳으로 옮겼다. 그 뒤 조조는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무평후(武平侯)로 봉해졌다. 그는 헌제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둠으로써 후한 조정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황실의 권위를 배경으로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조조는 한호(韓浩)의 건의를 받아들여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했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수많은 인재를 등용하여 위(魏)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조조는 202년 원소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원소의 근거지인 하북(河北) 지방 공략에 나섰고 207년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다. 208년 승상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중국 통일을 위한 남정(南征)에 나서 형주(荆州)를 점령하였으나, 적벽에서 손권(孫權)과 유비(劉備) 연합군에 패하여 형주의 일부를 도로 내주었다. 그 뒤로도 조조는 여러 차례 관중(關中)과 한중(漢中) 지역을 공략하며 중국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13년 조조는 위공(魏公)으로 봉해졌으며, 216년에는 스스로를 위왕(魏王)으로 봉하고 황제와 마찬가지의 권력과 위세를 행사하였다. 그는 220년 3월 15일(建安 25년 1월 23일)에 병으로 낙양에서 죽었는데, 죽은 뒤 무왕(武王)의 시호를 받았으며, 4월 11일에 업성(鄴城)의 고릉(高陵)에 묻혔다.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위왕 지위를 계승했다. 이후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 황제가 되었으며, 조조는 무황제(武皇帝)로 추존되고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조 [曹操] (두산백과)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갈량 (0) | 2020.10.09 |
---|---|
손권 (0) | 2020.10.09 |
삼국지 인물 유비 (0) | 2020.10.09 |
삼국지 인물 평가 개략 (0) | 2020.10.03 |
사돈이란 말의 유래 (0) | 2020.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