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행정, 지방 자치

해방 후 미군정의 실태 분석

신풍 2020. 10. 4. 09:13

1. 서론 

 

일단 미군정의 진행상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1945. 9. 9 - 미군이 한국에 상륙했습니다

         9. 12- 미군 아놀드 소장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구요

                   슈이크 라는사람이 경무국장이 되었죠

         9. 12일 있었던 이 상황이 우리나라 미군정부의 첫번재 정부조직개편입니다

         9, 14 - 조선총독부 사무를 군정청에서 인수했습니다

                    이때 행정의 연속성을 위해서 그당시의 일본행정관료들을 해고시키지 않고

                    행정고문이라는 제도로 계속해서 유지 했습니다.

         9. 15 - 총독부 사무를 군정청에서 인수하고 나서 미군들 중 각국장(현재 각부 장관 급 해당)을 임명했습니다.

 

미군은 우리나라에 군정청이라는것을 두어서 민주주의과, 법치주의를 추구하는 행정의 이념 아래

 해방된  대한민국을 통치했습니다.

 

미군정의 배경은 1945년 8. 15일  해방 이후에 상하이에서 유지해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부가 되느냐

아니면 국내거주 운동가 중심의 정부를 꾸리느냐의 문제로

아나키(무정부상태)였던 상태에서 미군정이 시행되게 되었습니다

 

2. 군정하의 행정부서 및 입법 사법부 

 

 

가. 주둔 초기 통치 기구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쇼와 천황의 항복 성명을 수용, 일반명령 제1호로 점령지역 연합군의 분할진주를 발표했다. 이어 바로 한반도 남부에 미군을 보내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육군 제24군단을 조선 지역 관할 부대로 정한다. 이때의 남한은 점령지의 성격이었다. 다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별개로 취급할 것을 특별 지시한다.

9월 8일 존 리드 하지 미육군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파견한 여운홍 등은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하지는 이를 거절하고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치볼드 V.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하지 산하의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9월 12일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들을 파직하고, 당일부로 미군 장교를 각 도의 장관에 임명하여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9월 14일부로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했으나 조선인 출신 조선총독부 고관들은 행정고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용하여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이용했다. 이때 말단 일본인 관료들은 10월까지 단계적으로 인수 인계 작업을 거친 끝에 해임시켰다.

 

나.  미군 부처장 임명

 

1945년 9월 12일 기준

  • 정무총감 : 미국 육군 대장 해리스
  • 광공국장 : 대령 선. C. 언더우드
  • 경무국장 : 대령 로렌섬
  • 법무국장 : 중령 에미리 J. 우달(Emery J. Woodall)->소령 매트 테일러(Matt Taylor, 11월 20일) -> 김영희(대리, 1945년 12월 10일)
  • 재무국장 : 중령 찰스. J 고든
  • 농상국장 : 중령 제임스 마틴 -> 이훈구(李勳求, 1946년 1월 6일)
  • 체신국장 : 중령 윌리엄 J. 할리
  • 교통국장 : 중령 워드 L. 해밀턴
  • 학무국장 : 소령 얼. N. 락카드 (학무국장 재직 중 미육군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 -> 유억겸(兪億兼, 1945년 12월 21일)
  • 학무국 학무과 성인문해교육계장(1945년 12월 21일)->성인문해교육과장(1946년 1월) : 황애시덕
  • 조선인교육심의위원회 위원 : 안재홍, 유억겸, 김활란
  • 정보국장 : 중령 헤이워드
  • 식량행정처장 : 지용은(1946년 1월 6일)

다. 한국인 관료 임명, 행정, 사법 부서 

9월 18일 미군 장교를 각 국장(局長)에 임명하고 9월 19일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원래는 점령군의 성격이었으나 조선인들에게는 점령군이라 하지 않고 일본군을 퇴치한 존재임을 집중 부각, 홍보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강점기의 악법들은 폐지했으나 신문지법·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은 처음에 김성수, 김도연, 윤보선, 조병옥, 김병로, 장택상 등 조선인 11명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했다가 뒤에 한국인을 행정에 참여시키고, 10월 2일에는 각 국장을 미군 장교에서 한국인들로 교체시켰다. 1946년 9월 12일에는 한국인 부처장(部處長) 20명에게 행정권을 이양했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 1946년 1월 1일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총파업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자 이를 불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그해 2월부터 여운형, 장건상 등의 온건 좌파와 원세훈, 안재홍 등의 온건 우파, 이순탁, 김약수, 노일환 등의 한민당 탈당파 일부를 중심으로 정권 이양을 계획한다. 재조선 미군정청(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은 한국어로 표시를 하였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미제의 남조선군정청(미제의 남조선간섭통치기)라고 불리며 재조선 미군정청을 가리킨다.

한국인 부처장[편집]

  • 민정장관 : 안재홍, 1947년 신설, 군정장관과 동격임
  • 경무국장 : 로렌섬->조병옥 ->1946년 경무부로 승격한다
  • 수도경찰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 : 장택상 -> 경무국이 경무부로 승격함에 따라 경무부 수도경찰청장으로 승격한다.
  • 경무국 수사과장 : 최능진 -> 경무부로 승격하면서 경무부 수사국장이 된다.
  • 법무부장 : 이인
  • 운수부장 : 민희식
  • 재무부장 : 김도연
  • 재무부 재산처분국장 : 윤치영
  • 농림부장 : 윤보선
  • 학무국장 : 유억겸(유임)
  • 학무국 성인교육과장 : 황애시덕(유임)
  • 인사행정처장 : 정일형
  • 외무부장 : 문장욱
  • 군정청 대법원장 : 김용무
  • 통위부장(국방부장) : 류동렬, 1945년 12월 신설
  • 감찰위원장 : 정인보

라. 입법부 구성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

1946년까지 미군정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고 다만 사법부장 겸 검찰국장에 이인, 대법원장에 김용무를 임명해 사법권은 한국인들이 자치적으로 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인들에게 치안권 이양 및 정권 인계를 위해 1946년 10월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여기에 군정청이 임명하는 46명과 각 도에서 주민이 선출하는 민선 의원 46명 등 총 92명의 인원을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중추원이 폐지된 후 본격적으로 활동한 근대적 의회였으며, 초대 의장은 김규식, 부의장은 신익희, 윤기섭이었다. 서울 중앙청에서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할 때는 애국가가 공식으로 행사에 처음 사용되었다.

1946년부터는 형식적으로 한국인 민정장관 안재홍을 임명해 행정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마. 좌우합작 정책 실패와 남한 단독 정부 수립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신탁통치문제를 국내의 좌우합작으로 해결하고자 시도, 미군정 고문 L.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김규식·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었다. 여기에 조선공산당에 타격을 주고자 조봉암 등의 1차 탈당, 여운홍, 장건상 등의 2차 탈당을 유도하고 이들을 좌우합작세력에 가담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의 계속된 암살과 학병동맹원 피살 사건, 정인수군 피살 사건, 윤명선 피살 사건, 대구 1946년  10월 1일 폭동 사태, 조선공산당 테러 사건, 인민일보 테러 사건 등으로 조절은 어려워졌고,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도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 좌우합작을 통한 신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려던 미군정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또한 미군정에서 극우파로 배격하던 이승만 역시 미군정을 무시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과 직접 상대하거나 미 국무부 내의 프린스턴 대학교 인사들, 하버드 대학교 인사들을 이용하여 좌우합작을 좌파에 유리한 정책으로 공격함으로써 미군정을 압박하였다. 그결과 미군정이 당초 의도했던 좌우 합작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